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보급 ==== 보급상황도 크게 열악했다. 애초에 미국은 한국에 6만명 수준의 군대를 보유할 계획을 잡았는데 실제로는 공비 토벌 등으로 인해 10만명에 육박할 수준으로 한국군의 규모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계획된 6만명 수준의 장비와 보급만 실시한 것이다. 이런 조치에는 이승만의 북진 주장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다. 애초에 지급된 물자의 양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비 토벌 등으로 인해 그나마 있던 물자도 빠른 속도로 소모하고 있었고 삼팔선에서의 국지 분쟁 등에서 미숙한 병력이 마구잡이로 탄약을 난사해서 미국 군사고문관들이 사격에 제한을 가하는 등 물자의 사용 측면에서도 비효율적인 면이 많았다. 결국 물자 부족과 정비 부족등으로 인해 개전 직전에는 소총, 대포, 트럭등 모든 장비에서 최소 15% 에서 많으면 35% 수준의 수량이 작동불가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를 해결하려고 일제히 서울과 부평에 있는 정비창에 장비를 후송보내는 조치를 취했다가 전쟁이 터지자 안그래도 부족한 장비 숫자가 더 줄어드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후송보낸 장비와 그나마 비축한 물자는 서울과 부평이 조기에 함락되면서 상당수량이 북한군에게 넘어갔으며 일부 수량은 [[인천상륙작전]]때 재탈환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장비 부족으로 인해 삼팔선 근방에 배치된 사단과 후방에서 공비 토벌을 하던 사단 간의 장비 종류가 차이나는 일이 많았다. 전방의 사단은 미제 소총으로 무장하고 공병부대 등 각종 지원부대가 존재했으며 피복도 미군용을 받은 데 반해 후방의 사단은 구일본군제 소총으로 무장하고 말 그대로 알보병만 있었으며 피복도 구일본군 피복을 약간 고쳐서 입었다. 당연하게도 장비 차이로 인해 동일한 인원이라고 해도 전투력의 차이가 났다. [[군량미]] 부족 문제도 심각했다. 개전 직전에 비상령을 해제하고 병력의 상당수를 휴가보낸 이유도 군량미가 고갈 직전이었고 식량창고에 부식인 [[건빵]]만 조금 남아있던 상태였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농번기라서 [[모내기]]를 해야 할 일손이 필요하므로 청년들을 계속 군대에 잡아놓을 수가 없었고 휴가를 통해서 일손을 돕게 할 필요성이 높았던 것이다. [[탄약]]의 경우에는 구일본군 공창이 있던 부평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구일본군 소총탄을 소량 생산하는 정도였고 시제품 소형 항공폭탄과 시제품 대전차지뢰가 약간 생산되는 정도였다. 개전 초반에 이들 물품은 대부분 불출되어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미제 보급품과 탄약은 앞서 말했듯이 서울과 부평이 조기함락되면서 북한군 손에 넘어간다. 결국 보급 문제도 미국이 참전하면서 서서히 개선된다. 다만 개전 초기에는 미군의 코가 석자일 정도로 미국쪽 수량을 채우기에도 빠듯했으므로 제대로 된 보급은 휴전선 근방에서 고착전이 발생하기 시작한 시점까지 가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